[스포츠][해축] 하루 늦은 맨체스터 더비 감상평 (데이터)
난갑니다용 작성일 01-16 조회 1,292
주말 맨체스터 더비를 굉장히 재미있게 봤습니다. 특별히 텐 하흐가 저번 더비에서 박살났던 전력이 있어서 그런지 평소와는 다른 전략으로 신경 써서 더비에 임한게 눈에 보였고 그것이 유효하게 작용한게 저한테는 꽤 인상적이더라구요. 몇가지 포인트들을 짚어보면서 개인적인 생각들을 정리해볼까 합니다.
여담이지만 최근의 축구를 보다보면 바둑이나 장기가 연상될 때가 많더라구요. 물론 제가 바둑을 둘 줄 모른다는게 함정이지만요. 예전 스타크래프트의 테테전을 보는 느낌도 많이 듭니다. 오버워치도 뜯어보면 마찬가지라는 시각들이 많은데 근본적으로 전쟁은 결국 땅따먹기 싸움이라는 뜻인지...
1. 선발 라인업
선발 라인업만 봐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최근에 상승세를 타고 있던 그 라인업과 다른게 눈에 딱 보였죠. 에릭센을 전진배치 시키는 대신 카세미루의 파트너로 프레드를 세웠습니다. 라인업만 보면서 맨체스터 시티의 공격 자원들이 중앙에서 활개치는 것을 프레드와 카세미루로 저지시키면서 공세보다는 수세에 신경을 쓰겠다는 의도가 느껴졌었고, 경기 양상 역시 그대로였습니다.
반면 맨체스터 시티는 크게 튀는 특별한 포인트는 없었고요. 또 주전 센터백들이 날아가서 아칸지 - 아케가 가동되었다는 점 정도.
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수비 전술
맨시티가 중원을 통해 공격 전개를 할 생각 자체를 못하게 하겠다 이런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4-2-3-1 기준으로 전방 4명은 대형 유지에 힘쓰고 카세미루는 베르나르두 실바, 프레드는 케빈 더 브라이너를 확실하게 따라다니면서 중원을 통한 공격 루트를 아예 틀어막겠다는 의도가 정말 노골적으로 보였죠. 스포티비 해설에서는 모든 선수가 맨마킹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만큼 수비 전술이 굉장히 뚜렷하고 상황에 따라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맨유 선수들이 명확하게 숙지를 하고 온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전방 4명이 대형을 유지하는 형태가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극단적으로 라인을 끌어올려서 맨시티의 수비수들을 본인들의 페널티 박스 근처까지 밀어내고 실수를 유발하겠다는 의도보다도 센터 서클 주변에서 저지선을 구축하면서 맨체스터 시티가 전방으로 볼을 투입할 수 있는 루트를 틀어막겠다는 의도가 더 선명하게 보였던 것 같아요. 이게 참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거든요. 로드리와 센터백들을 너무 자유롭게 놔두면 또 어떻게든 패스길을 찾아내니 지속적으로 압박을 하긴 해야하고, 억지로 저지선을 통과하려고 하면 순간적으로 에워싸서 볼을 탈취할 수 있는 최적의 포지셔닝을 가져가야 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맨유의 전방 4명은 굉장히 훌륭했었습니다.
MOTD에서도 이 점에 주목하면서 맨유의 수비 전술을 조명해줬습니다. 이 경기를 전술적으로 다뤄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지점을 빼먹고 이야기 할 수가 없긴 했죠. 그게 정말 잘 보이는 경기이기도 했고...
3. 공략에 어려움을 겪던 맨체스터 시티
이러한 수비 저지선은 카세미루와 프레드가 베르나르두 실바와 케빈 더 브라이너를 효율적으로 봉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효율적인 수비 저지선은 이 둘에게 받기 좋은 패스가 이어지는 것을 방해했으며, 불안정한 패스가 연결되었을 때 카세미루와 프레드는 이 둘에게 적극적으로 달라붙어 볼을 탈취하는데에 성공했습니다. 카세미루야 뭐 이 분야에서 세계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니 그러려니 하는데, 프레드가 KDB를 굉장히 잘 막는 것이 또 놀랍더군요.
물론 다른 경기에 비해 KDB 경기력이 꽤 좋지 않다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만... 여러모로 좀 실망스럽긴 하더라구요. 경합을 억지로 이겨내고 틈새를 만들지는 못할지언정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판단이나 선택들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계속 지워지고 있으니까 펩이 아예 사이드로 빼주기도 했는데 거기 가서도 별다른걸 만들어내지 못한데다가 패스 미스들이 이어지고 그랬으니.
그리고 기록적인 득점 페이스를 가져가던 홀란드도 이런 상황이 되면 본인이 별로 할 것이 없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엘링 홀란드의 한계점이 뭘까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딱 이 경기 전반전 보시면 됩니다. 본인도 답답한지 전반 초반부터 미드필더 지역까지 내려와 공을 받아주고 그랬는데 말 그대로 내려와서 수비수한테 패스 받자마자 되돌려주기 이거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더라구요. 요즘 조직화된 수비들이 고작 그런 움직임만으로 균열을 내주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거기서 점유를 하거나 볼을 배급하거나 턴을 하면서 팀을 전진시킬 수 있었으면 벤제마, 케인 상위호환 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물론 이러한 수비 대형을 공략하는 방법들은 여러가지가 있고 실제로 펩은 경기 초중반부터 계속해서 그런 것들을 시도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역시 측면 공략이겠죠. 저 덫을 정직하게 정면으로 돌파하기보다는 우회해서 공략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고, 펩은 풀백들을 인버티드 롤로만 쓸 줄 아는 바보는 절대 아니니까요. 맨유의 전방 4명이 부지런히 움직이기는 했지만 일단은 중원 수비에 우선순위가 있었고 맨시티의 풀백들은 측면도 효율적으로 공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선수들입니다.
문제는 이 풀백들에게 빠르고 정확한 패스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다는 점. 능력이 안되는건지 소극적이었던건지 맨시티 센터백들의 패스가 많이 아쉬웠습니다. 적절한 타이밍에 빠른 패스가 이어지는 장면들이 많이 보이지는 않더라구요. 조금이라도 늦으면 맨유의 선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측면도 봉쇄해버렸거든요. 괜찮은 패스가 나가도 측면에서 좋은 연계나 특별한 움직임들이 많이 보이지는 않았고, 제 눈에는 그러한 볼을 받아가려는 움직임들 자체도 별로 조직적이지 않았던 느낌. 좋을 때의 맨시티 기준이라면 그래도 어찌저찌 좀 더 빠르게 공략에 성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더라구요. 디아스나 라포르트가 있었다면 좀 달랐을까 싶기도 하고요. 마레즈만 좀 고군분투했던 걸로 기억나는데... 완-비사카나 말라시아도 이 경기에서 성실하면서도 좋은 측면 수비를 보여줬죠.
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공격 컨셉
물론 맨유도 이러한 대형을 가져간 대가를 치르긴 했습니다. 바로 3선에서 공격을 효율적으로 풀어줄 선수가 없어졌다는 점. 평소에는 카세미루 옆에서 에릭센이 이러한 공격의 윤활유 역할을 많이 해주었는데, 이번 경기에서는 에릭센이 전방으로 올라가고 프레드가 있었죠. 카세미루가 패스 자체를 못하는 선수는 절대 아닙니다만 예전에도 이야기했듯 빌드업의 줄기를 맡아줄 메인 피벗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는 아닙니다. 이건 프레드도 마찬가지. 그래서 이번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점유와 지공을 아예 포기했습니다.
유의미하게 전방으로 뻗어나가는 패스가 거의 없는 프레드의 이번 경기 패스맵.
카세미루의 전반전 패스맵도 마찬가지. 애초에 여기를 중심축으로 활용할 생각도 별로 없었습니다.
에릭센과 브루노의 이번 경기 패스맵. 여기서 컨셉이 딱 보이죠. 맨유가 가장 잘하는 것은 빠른 공수전환에서의 역습 공격. 솔샤르 때도 이건 기가막히게 잘하던게 맨유였기도 했고요. 좀 부정확하더라도 볼을 탈취하자마자 전방으로 롱패스 위주의 빠른 볼 배급을 시도하고 절정의 폼을 보여주고 있는 래쉬포드의 개인 능력 위주로 마무리를 짓는다. 이것이 이번 경기 맨유의 공격 컨셉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이번 경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공격을 정말 완벽하게 대표하는 장면이 아닐까 싶어요. 프레드와 카세미루가 3선에서 빌드업하려다가 역시나 실패를 하고, 다행히도 바로 커팅을 한 직후에 브루노가 래쉬포드에게 바로 수비 뒷공간 긴 패스로 찬스를 만들어내는...
맨시티가 이러한 맨유의 공격 전개를 아예 못막고 이런건 아니고 오히려 실점 장면까지도 괜찮게 제어를 했다 정도로 보긴 했는데 후방에서 큼지막한 실수가 잦아서 결정적인 찬스 자체를 맨유가 더 많이 만들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센터백들이나 에데르송이나... 맨유가 전반전에 먼저 골을 넣어도 이상하지 않았죠. 그래서 저는 본질적으로 보면 맨유가 준비를 굉장히 잘 해왔지만 결국 맨시티가 본인 스스로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경기에 가깝지 않나 싶더라구요. 물론 맨유의 노림수도 그것을 어느 정도 의도한 것이었겠지만요.
5. 하지만 진짜는 따로
후반전에는 드디어 맨시티가 맨유 공략법을 찾아내고 주도권을 틀어쥐기 시작했습니다. 맨유도 찬스를 아예 만들어내지 못했고, 시티는 측면 전개 위주로 전반전보다 훨씬 쉽게 전진하며 박스 근처에서 찬스들을 만들어갈 수 있었죠. 그릴리쉬의 득점은 그러한 흐름 속에서 정말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뜬금포가 아니라 터질 것 같았던 득점이 터진 느낌이었죠.
여러모로 맨유의 컨셉이 선제 실점을 염두해둔 모양새가 아니었고, 시티도 리드를 잡는다면 무리하게 뒷공간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필드 전체에서 안정적으로 경기를 운영할 수 있었기에 저는 이 득점으로 경기 결과는 사실상 끝난 것이라 생각을 했지만
이런저런 전술적인 이야기들의 의미를 한번에 파묻을 만한 큰 일이 발생을 하는 바람에...
뭐 그렇습니다. 축구는 감독의 전술 놀음이지만 전술의 유불리로만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경기 그리고 시즌을 지배하기도 하죠. 지난 시즌 레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리그 우승도 그렇고... 바스켓이 산수가 아니듯이 축구공도 둥그니까.
그래도 정신줄을 다잡고 좀 더 맨시티 수비진들이 집중력을 발휘했으면 역전까지는 내줄 이유도 없었겠다 싶지만 뭐 그게 퀄리티 차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겠죠. 역전골 장면은 너무 어설프더군요.
댓글 0 개